작가가 거주하며 작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레지던시’가 미술관이나 갤러리 못지않게 점점 많아지고 있다. 동시대미술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레지던시에도 참여하며 자신의 활동 반경을 넓혀나간다. 레지던시는 단순히 작업공간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작가에게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경험이 되고 있다. 작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스스로를 고립시켜 새로운 시리즈에만 몰두할 수 있으며,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적 지리적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기회를 갖는다. 큐레이터, 평론가와의 네트워크 확장, 동료 작가와의 관계 형성도 작가로서의 활동을 지속하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작가 이향안은 부산에 위치한 홍티아트센터에 6개월여의 기간 동안 입주해있으면서 기존의 작업 맥락을 발전시킴은 물론, 부산 주변 일대 곳곳을 발 빠르게 다니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한 신작을 제작했다. 이향안은 기존에 <일상과 환상>이라는 시리즈를 통해, 도시 내의 비루한 공간, 별 볼일 없는 장면을 포착하여 사진으로 인화하고, 해당 이미지 위에 구슬, 거울, 혹은 해당 장면과 잘 어우러지는 독특한 오브제를 얹어 재촬영하는 방식의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일상적으로 접하지만 사람들 대부분 무심코 스치고 지나갈 법한 남루한 도시 풍경은 작가가 추가적으로 배치한 오브제를 통해 반짝반짝 빛나는 마법 같은 장면으로 탈바꿈한다. 이번에 홍티아트센터 전시실에서 열린 개인전 <따뜻하고 푸른 물결>(2018.6.27.~7.13)에서도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 있는 신작을 출품하였다. <따뜻하고 푸른 물결_가까운 바다> <따뜻하고 푸른 물결_먼 바다> 시리즈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진’이 사실 그대로를 투명하게 전달하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럴듯하게 비슷해 보이는 사진 한 장으로 거짓이 사실이 되기도 하고, 중요한 증거 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손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예로, 광고판에서 쉽게 발견하게 되는 연예인 모델의 사진을 떠올려보자. 게시된 사진들은 조명과 여러 차례의 후보정을 거쳐 탄생하게 된 ‘작품’으로, 현실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이처럼 우리는 더 이상 사진이 ‘진실’만을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사진의 매체적 특성에 관한 고민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작업을 선보인 작가로, 토마스 데만트가 있다. 그는 특정 매체를 통해 접하거나 기억 속의 실제 사건 현장의 모습을 실제와 동일한 크기의 카드보드지로 정교하게 만들고 촬영한 뒤, 만든 모형을 파기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토마스 데만트는 사진이 실재를 조작하거나 더 나아가 허구를 담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사진의 전통적 속성이라 사람들이 여기는 통념을 거스르는 일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향안 또한 사진의 ‘투명성’에 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향안의 작업은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는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 위에 오브제를 얹어 화면을 새롭게 구성하고, 그 상태를 다시 사진으로 포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사진을 처음 접하면 초현실적이고 비범하게만 느껴지지만, 조금만 유심히 오래 들여다본다면 그것이 사진과 오브제가 병치된 이미지임을 알아챌 수 있다. 완벽한 눈속임을 의도적으로 포기한 그의 작업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으로, 그것 위에 다시 3차원의 오브제를 얹어 또 다시 2차원으로 환원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어쩌면 이향안은 사진을 여타 다른 오브제와 동일하게 물질성을 가진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한다면, 오브제와 사진이 함께 병치된 설치 작업 <물 위, 땅 위, 하늘 위> <죽은 동백을 위한 시> 역시도 앞서 살펴 본 사진 작업을 공간으로 확장시킨 버전이다. 이 작업은 홍티아트센터 전시장의 중앙에 디스플레이되어 사진이 스스로를 벽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작가는 이제 그의 실험의 결과물이 ‘사진’이어야 한다는 자신의 작업 과정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는 듯하다. <죽은 동백을 위한 시>는 아크릴 조각 위에 동백섬에서 촬영한 동백꽃 사진을 출력하여 얹고 그 위에 그물망을 두었다. 사진 위에 오브제를 얹은 뒤 다시 촬영을 해왔던 이전 작업과는 달리, 이향안은 재촬영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대신 사진과 오브제가 병치되어 있는 상황 그 자체를 관객에게 노출시킨다. <Balancing>에서는 방수포장천을 제일 아래에 두고, 버려진 깃대를 세웠다. 그 위에는 촬영한 사진과 영상 이미지를 쌓아 올려, 진짜이면서 동시에 진짜가 아닌 어떤 것을 만들었다. 이것은 마치 조각가가 하나의 오브제를 만들 때 나무, 돌, 점토 등 다양한 재료를 함께 사용하는 것과 같이, 사진이나 영상을 여타 재료와 크게 다르지 않게 작품을 구성하는 재료 중 하나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 시간을 보여주는 ‘증거’로서의 발견된 사물(objet trouvé)과, 이향안이 포착한 ‘순간’의 사진과, 실제 시간을 가상의 시간에 옮겨 기록한 영상 클립은 자연스럽게 한 몸이 되어 관객 앞에 서 있다. 현실의 오브제, 카메라를 통해 매개되어 기록한 사진과 영상을 통해 은 여러 층위의 시간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물 위, 땅 위, 하늘 위>에서는 사물-사진-영상의 관계가 한층 더 복잡하게 뒤얽힌다. <Balancing>에서는 각기 다른 차원의 기록이 단순 병렬적으로 제시돼 있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실제 오브제와 영상으로 포착한 풍력발전기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설치해 두었다. 영상 속의 풍력발전기는 실제 바람이 불 때에만 작동하는 장치이기에, 해당 영상이 촬영된 순간에 작가는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았을 것이다. 영상 클립으로 저장되면서 촉각, 후각과 같은 다른 감각은 전시장에 옮길 수 없었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사진 설치 귀퉁이에 선풍기를 틀어, 공중에 매달린 빨래건조대에 매달아 둔 부표가 끊임없이 부유하도록 연출했다. 앞서 살펴본 작업은 실제 오브제, 사진, 영상이라는 세 가지 다른 ‘재료’를 혼합하고 중첩시켜 각기 다른 매체가 가지는 특성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보였다. 혹은 카메라를 거쳐 바라본 세상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 의심해보게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작품에서는 대부분 매체적, 형식적 실험이 내용보다 더 중요하게 눈에 들어왔다면, <314km>와 <8개의 바다 조각>에서는 이방인으로서 부산을 바라보는 이향안의 감정이 더 직접적으로 전달됐다. <314km>는 약 15개의 클립과 이향안이 직접 적은 메모들로 구성됐다. 서울에서 진행한 작업은 대부분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공간을 낯선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거나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면, 부산에 온 이향안은 정반대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강렬한 사투리, 짙은 바다 냄새, 부산은 작가에게 온통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가득한 미지의 세계이다. 작가는 밖으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안으로는 동시에 본래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 숙고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가 경험한 부산은 <314km>에서 작가가 느슨하게 이어 붙인 여러 개의 영상,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스스로 읊조린 일기 같은 짧은 노트로 요약된다. 영상과 나레이션은 서로 큰 연관성을 가지지 않은 채로 함께 편집되어 작가의 무의식 속 흐름을 따라가는 듯하다. “작업실에서는 항상 바다냄새가 났어” “서울 부산의 거리, 천리길, 314km, 직선거리” “서울에서 간혹 부산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 인사를 했어” “내가 서울에서 이렇게 많이 한강변을 걸어본 적 있던가” “All she got is big heavy camera” “어느 곳에서 일시적으로 산다는 것” “어떤 풍경은 여전히 지속되는 산과 같은 것, 어떤 풍경은 아주 생경한 여행 같은 것”…. 이향안은 지극히 작가의 시점에서 경험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해 말하거나, 부산에 짧은 기간 머물다 떠나게 될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놓는다.

이향안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활용해서 가상과 실재, 그 경계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 <따뜻하고 푸른 물결>에서는 작가의 기존 관심세계를 지속하면서도 동시에 평면을 벗어나 더욱 적극적인 형태로 공간에 개입하는 실험을 펼쳐보였다. 이는 작업 과정의 일부를 관객에게 공개하는 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더 나아가, 각기 다른 시간의 층위를 여러 겹으로 쌓아 대상을 입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 모두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을 비범하게 재탄생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대상에 애착을 가지고 그것과 함께한 시간이 누적될 때 그것은 특별한 무언가가 된다. 이향안의 작품은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음과 동시에 회색빛의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방식을 제안한다. ‘따뜻하고 푸른 물결’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_무엇이 진짜일까? (글 : 독립큐레이터 최정윤 / 전시 <따뜻하고 푸른 물결>,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