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바닥들, 바닥의 사진들
이지안 작가론
권태현



사진을 찍은 사진들이 있다. 촬영한 사진을 뽑아 바닥에 놓고, 다른 오브제들과 함께 배치해 다시 찍어내는 이지안의 사진들. 그 형식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분석하거나, 그것이 사진 자체의 안팎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분석하는 것도 흥미롭겠지만 이 글은 조금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서는 그 사진의 바닥(들)을 본다.


초기 작업 〈The Por.tree.t〉부터 가장 최근의 《Just After Chrismas》 전시까지. 사진 속에 사진이 드러나는 양상은 달라지고 있지만, 사진이라는 오브제를 다른 오브제들과 함께 화면에 배치해 다시 촬영하는 형식은 일관적이다. 여기에 더하여 작업들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사진 속 사진이 대체로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편집을 하지 않고 실제 공간에 사진과 사물들을 함께 겹쳐놓는 이지안의 이미지 제작 방법에서 그 바닥의 레이어는 포토샵의 관념적인 바탕 레이어가 아니라 단단히 디딜 수 있는, 중력이 작용하는 바닥이라는 점에서 짚고 넘어갈 만하다.


사진 속 물체들은 그 사진-바닥을 딛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카메라 렌즈의 방향과 바닥이 수직을 이루는 극단적인 부감으로 담아낸다. 사물들이 내려앉은 중력의 방향과 카메라가 포착하는 시점의 방향이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를 보는 관객들이 던지는 시선은 사진 속의 사물들처럼 사진-바닥에 안착하지 못한다. 시선이 내려앉은 그 사진에는 또 다른 방향의 바닥을 가진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사진 속 사물들이 그 사진-바닥 위에 올라있다는 것을 감각하면서도 동시에 관객의 시선은 저 풍경 너머로 끊임없이 낙하한다. 단단한 바닥이 순간, 심연(abîme)이 된다.


사진 속의 사진들은 시리즈에 따라 도시의 모습이나 이국에서 마주한 풍경 등 그 주제가 다양하지만, 일반적이고 인간적인 사진의 시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밑바닥의 사진들은 대부분 촬영자가 바닥에 발을 딛고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을 카메라로 담아낸 이미지들이다. 그 세계 안쪽의 바닥과 그 사진 바깥 세계의 바닥은 또 다른 사진으로 매개되어 납작하게 붙어있지만, 그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제각각의 시점은 문제적으로 교차된다.


그렇기에 이지안의 작업은 단순히 환영을 만드는 것에서 훨씬 더 나아간다. 작가가 교차해 나가는 명사로서의 사진과 동사로서의 사진 사이에서 감각되는 것은 환영 그 자체가 아니라, 환영적으로 작동하는 부분과 그것이 깨어지는 부분, 다시 말해 하나의 이미지 안에 복수의 바닥들을 통해 접붙어 있는 다른 세계와 다른 시점들의 교차와 압축이다. 다중의 바닥과 시점이 엇갈리면서도 하나의 사진 이미지 내부에 공존하고 있기에, 하나의 눈으로 세계를 담는 카메라와 단단한 바닥을 딛고 있는 주체는 자꾸만 끝도 없이 푹 꺼져버리는 바닥에 발을 헛디딘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바닥을 더 생각해 볼 수 있다. 벽에 걸린 그 사진을 보고 있는 관객들이 딛고 있는 바닥이다. 다중의 바닥을 가진 이미지는 보는 사람이 딛고 있는 바닥을 순간적으로 다시 내려다볼 틈새를 마련하기도 한다. 사진의 바닥이 그렇게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는 문제는 이지안의 설치 작업들을 통해 더 명확해진다. 재개발을 앞두고 비어있는 강남아파트에 설치했던 작업에서 작가는 공간의 부분들을 찍고, 그것을 프레임 없이 같은 공간에서 눈을 돌려 볼 수 있는 다른 곳에 붙여 건축적 자리바꿈을 시도한다. 이 글의 맥락에서 그 작업을 다시 비추어보면, 천장의 형광등을 같은 스케일로 바닥에 거울처럼 붙이면서 만들어지는 상반되는 시점의 교차를 심연을 배치하는 것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지안의 작업에서 바닥에 사진을 설치하는 케이스를 더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물 위, 땅 위, 하늘 위〉는 바닥에 그 밑으로 쭉 뻗어 나가는 시점을 가진 풍경 사진들을 놓고, 사진들의 가운데에 바람에 돌아가는 프로펠러의 무빙이미지를 배치했다. 그리고 바닥에서 돌아가는 프로펠러 이미지가 마치 그 위의 모빌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장치들을 구성해 놓았다. 물리적 상관 관계에서 벗어나 허구적인 힘의 작용을 만들어내는 이 작업은 바닥들의 교차뿐만 아니라, 지각과 운동의 틀을 자리 바꾼다. 자크 랑시에르가 거듭 강조하듯, 허구(fiction)는 원래 뭔가 상상의 것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할 수 있는 것 사이의, 의미 작용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것에 더 가깝다. 세계가 사건과 형상으로 채워지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방법이 바로 픽션이다.


일련의 바닥 문제는 더 나아가 이지안의 작업이 딛고 있는 바닥/토대/근본(ground) 또한, 재고할 여지를 마련한다. 작가는 사진이라는 매체와 그 본질에 대해 언급하곤 하지만, 그 내용은 인간적인 사진가와 기계적인 사진의 모순적인 만남, 혹은 주관과 객관의 변증법 등으로 애초에 근본 없이 양가적이다. 그의 인식과 체계, 그리고 작업들은 이미 사진이라는 바닥을 벗어나, 다른 바닥들과의 교차 속에 위치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닥이 얼마나 단단한지, 우리는 어디를 딛고 있는지, 혹은 어디를 딛고 서야 하는지가 아니다. 오히려 바닥은 얼마나 다층적인지, 사실 그것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언제든지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것인지를 다시 감각하는 문제가 역설적으로 더 근본적인 바닥에 있다.